‘쿵.’
배 안쪽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내 아래에서 배가 무너지고 있다.
바다가 아니라. 폭풍도 아니라.
내가 발 디딘 곳 자체가 내 발밑에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몸이 먼저 그렇게 말했는데, 머리는 반대로 굴었다.
(아니. 지금 나가면… 끝이야.)
난파선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생물처럼 마지막 발악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기울고, 더 찢어지고, 더 깊이 잠긴다. 그 안에 남은 모든 것은 바다와 함께 수장될 것이다.
나는 가늘게 숨을 들이쉬었다.
젖은 공기가 목을 긁고 들어왔다.
“괜찮아… 하나씩.”
나는 내 입으로 내 다짐을 꺼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얇게 떨렸지만, 그래도 말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마음이 조금 덜 무너졌다.
발바닥 밑의 나무가 삐걱거리며 항의했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그러면서도 멈추지 않고—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선실로 향하는 통로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이치면서 만들어낸 축축한 냄새, 젖은 나무의 썩은 향, 금속의 비린내가 섞여… 마치 이 배가 한 번도 깨끗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냄새 사이사이에, 아주 희미하게.
…사람 냄새의 잔향.
나는 턱을 꽉 깨물었다.
(엘리너…)
이 배 안 어딘가에, 정말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착각은 기대를 낳고, 기대는 아주 잔인하게 사람을 무너뜨리니까.
다시.
‘쿵.’
이번엔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위쪽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바닥을 바라봤다.
바닥에 금이 가 있다.
저 금이 조금만 더 벌어지면…
나는 숨을 삼켰다.
(빨리.)
하지만 “빨리”는 실수의 다른 이름이다.
엘리너가 늘 그러지 않았던가.
“지금은 생각하지 마. 손부터 움직여.”
나는 손부터 움직였다.
선실 입구에는 반쯤 열린 나무문이 있었다.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문이 ‘끼익’ 하고 울었고, 그 소리는 어둠 속에서 뭔가가 대답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무도… 없어.”
나는 누구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그 어둠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서.
가죽 가방 끈을 다시 조여 매고, 허리에 감아둔 밧줄이 단단한지 확인했다. 밧줄 끝은 밖에 매어 두었다. 혹시나 내가 안에서 길을 잃거나 갇히면, 이 줄이 나를 끌어낼 유일한 손이다.
나는 손바닥에 힘을 줬다.
문을 밀었다.
그리고—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다.
배는 부서졌지만, 선실은 아직 형태가 남아 있었다. 물은 바닥에 얕게 고여 있었고, 흔들릴 때마다 출렁이며 내 발목을 적셨다.
한쪽 벽에는 상자들이 있었다. 반쯤 깨지고 젖었지만, 그래도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상자… 상자 안엔…!)
마치 보물상자를 앞에 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이런 심장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한다.
희망이 아니라—물건. 물건은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가장 가까운 상자를 열었다.
젖은 천.
옷가지.
리넨.
그리고… 작은 금속 통.
나는 통을 열었다.
안에는 부싯돌과 작은 철이 있었다.
“불…!”
이번엔 진짜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찡해질 정도로 반가웠다.
불이 있으면 밤이 달라진다.
불이 있으면 짐승이 달라진다.
불이 있으면 내가… 덜 무서워진다.
나는 그 통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가장 먼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처럼.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딱딱한 비스킷들이 들어있는 자루. 이미 젖어있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다. 내 이빨이 견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금속… 금속 냄새.
나는 손을 멈췄다.
(이건…)
상자 안에는 작은 탄환 같은 것이 굴러다녔다. 동그랗고 차가운 납덩어리들.
내 목이 말랐다.
총.
총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상자를 더 깊이 파헤쳤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물에 젖은 나무 조각들이 손톱 밑에 끼었고, 그게 따갑게 느껴질 만큼 감각이 살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벽 쪽에 기대어 있는, 길쭉한 물건.
나무와 금속이 엮인.
나는 숨을 멈췄다.
총이었다.
말로만 듣던 공포의 도구가 아니라, 갑판 위에서 멀리서만 보던 그 물건이 아니라… 지금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현실의 무게.
나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총을 들어 올렸다.
무거웠다.
놀랄 만큼 무거웠다.
‘힘’이란 단어가 아니라 ‘책임’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총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물건이 아니다. 총은 사람을… 바꾼다.
그래서 나는 더 무서웠다.
(난… 이걸 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엘리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겁나면 지금이라도 내려.”
나는 입술을 떨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 살고 싶어.”
그건 내가 처음으로 아주 솔직하게 인정한 욕심이었다.
나는 총을 가방에 넣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총은 어깨에 멜 수 있게 끈이 있는지 확인하고, 젖은 천을 찢어 임시로 끈처럼 묶었다. 칼이 있으면 더 쉬웠겠지만… 지금 내게 칼은 없다.
그럼에도.
손은 계속 움직였다.
탄환이 든 상자도 챙겼다. 그리고 그 옆, 작은 나무 상자 하나.
상자 위에는 붉은 왁스가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열었다.
…검은 가루.
화약.
내가 이걸 알아볼 수 있는 게, 이상하게 슬펐다.
나는 집에서 이런 걸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 바다는… 바다는 사람에게 이런 걸 가르친다.
나는 화약 상자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쯔득…’
어딘가에서 나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선실 천장 쪽, 큰 보가 비틀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물에 젖은 나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는 중이었다.
먼지가 떨어졌다.
물결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내 심장 속으로도 옮겨왔다.
(지금 나가야 해.)
이번엔 진짜였다.
나는 총을 어깨에 걸고, 화약 상자와 탄환 상자를 보자기에 감아 허리에 묶었다. 손이 서툴렀다. 매듭이 이상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은 예쁘게가 아니라, 살아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발목이 뭔가에 걸렸다.
“윽…!”
나는 중심을 잃고 물 속으로 반쯤 넘어졌다. 차가운 물이 치마 밑으로 스며들었다. 숨이 턱 막혔다.
무엇에 걸린 거지?
나는 발목을 잡아당겼다. 움직이지 않았다. 더 잡아당겼다.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래를 보니… 끊어진 밧줄이 내 발목을 감고 있었다. 아마 폭풍 때 풀려나온 것이 여기저기 얽힌 모양이다.
(안 돼. 이런 걸로 죽을 수는 없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밧줄을 풀려고 손을 넣는 순간—
‘쿵!!’
이번엔 정말 크게.
선실 천장이 내려앉았다.
목재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폭발하듯 튀었다. 바닥의 물이 한 번 크게 출렁이며 내 무릎까지 올라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갇히면 끝이야!)
손이 떨렸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아마도). 울면 아무것도 못 한다.
나는 밧줄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손톱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피가 물에 섞였다. 그래도 당겼다.
“제발…!”
그때.
밧줄이 ‘툭’ 하고 풀렸다.
나는 거의 넘어지듯 일어나 문 쪽으로 뛰었다. 바닥이 흔들렸다. 벽이 삐걱거렸다. 물이 더 들어왔다. 배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문을 밀쳤다.
문은…
안 열렸다.
“뭐야…!”

문이 물에 젖어 부풀었는지, 틀어졌는지, 걸렸다. 나는 두 손으로 문을 밀었다. 어깨로 들이받았다.
문은 요지부동.
심장이 목까지 올라왔다.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옆을 돌아봤다. 선실 벽에는 반쯤 부서진 창문 같은 틈이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저기로…!”
나는 총이 걸리지 않게 몸을 낮추고,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가슴이 걸렸다. 숨이 막혔다. 젖은 천이 피부를 잡아당겼다.
(밀어. 밀어. 밀어!)
나는 어깨를 비틀어 빠져나갔다.
밖으로 몸이 튀어나오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갑판 위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뒤를 돌아봤다.
선실 쪽이 ‘쾅’ 하고 더 내려앉았다.
만약 내가 문 앞에서 3초만 더 망설였더라면… 나는 그 아래에 깔렸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살… 았어…”
그 말이 기도처럼 새어 나왔다.
이제 남은 건 돌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도 쉬울 리 없었다.
나는 뗏목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파도가 갑판을 훑고 지나가며 내 발을 잡아당겼다. 뗏목은 여전히 통과 판자에 묶여 떠 있었지만, 파도에 밀려 배 옆을 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짐을 실었다.
화약, 탄환, 부싯돌, 비스킷 자루, 그리고 총.
총을 뗏목 위에 올릴 때,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 물건이 바다에 빠지면… 내 손으로 다시는 찾지 못할 것이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줬다. 단단히 묶었다. 정말 단단히.
그리고 밧줄을 잡고 바다로 내려갔다.
물은 아까보다 더 거칠어져 있었다. 배가 더 기울면서 파도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뗏목이 옆으로 기울었다. 자루가 흔들렸다.
“안 돼—!”

나는 섬에 이어놓았던 밧줄을 당기며 물길을 헤쳐갔다. 손바닥이 타들어 갔다. 하지만 뗏목들은 따라왔다. 파도는 한 번 더 덮쳤다. 소금물이 눈에 들어가 따갑게 찔렀다.
눈물이 아니었다. 바닷물이었다.
그런데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옛날에 해변가에 놀러왔을 때랑은 딴판인 것이 웃겼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 해변을 향해 끌어갔다.
마침내 발밑이 모래가 되었다.
나는 뗏목을 모래 위로 끌어올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몸이 떨렸다. 팔이 저렸다. 하지만…
짐은 살아 있었다.
내일도 살아 있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뗏목 위에 올려진 총을 바라봤다.
총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이제 네 차례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손을 뻗어 총의 차가운 금속을 살짝 만졌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잠잠해졌다.
무서운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 사람은 흥분해야 하는데, 나는 반대로… 차분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섬에서 나는 누구의 딸도 아니고, 누구의 승객도 아니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나는… 나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총은 그 현실을 아주 차갑게 알려주는 증거였다.
나는 총을 품에 안고, 모래 위에 머리를 잠깐 기대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정말 짧게만…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하늘의 색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진 파랗기만 했는데, 이제는 멀리—수평선 끝에—먹물이 번진 듯한 구름이 얇게 깔려 있었다.
바람이 바뀌었다.
가볍던 바람이, 손톱처럼 피부를 긁고 지나갔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하늘을 바라봤다.
“설마…”
목이 마른데 침이 더 말라붙었다.
난파선은 더 낮아져 있었다. 돛대 끝이 겨우 보일 정도.
그리고 그 구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엘리너가 한 말이 떠올랐다.
“바다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나는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난 살아.”
그 말은 바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폭풍이, 다시 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