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아니, 방금 전까지 내 세계를 찢어발기던 폭풍이 정말 존재했냐는 듯, 파도는 얌전하게 모래를 핥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둥글고, 햇빛은 따뜻했다.
…정말 성질 나쁘게도.
나는 젖은 모래 위에 엎드린 채 한참을 숨만 쉬었다.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작업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가슴이 쿡쿡 찔렸다. 목구멍은 소금과 피와 모래맛이 섞여 따가웠다.
“살… 아…”
입에서 소리 같은 게 나왔다. 말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살아있다.
그리고—
“엘리너…”
나는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키며, 바다 쪽을 향해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바람이 가져다 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대답은 없었다.
당연히 없지.
당연한데도, 그 당연함이 이상하게 화가 났다. 분노라는 감정은 사람을 살게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의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봤다.
해변. 길게 뻗은 모래사장. 야자수와 덩굴이 엉킨 숲. 바위가 듬성듬성 박힌 해안선. 그리고—가장 중요한 것.
물 위로 삐죽 솟아 있는 검은 그림자.
난파선.
부서진 돛대 끝이 마치 바다가 “봐, 여기 있어” 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파도에 흔들리며,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이 가라앉는 중이었다.
“아…”
나는 숨을 들이켰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엘리너가 아니라, 배가 보였기 때문에. 그게 내 상황을 너무 명확하게 보여줬다.
나는 저 배를 타고 온 사람이다.
그 배가 가라앉고 있다.
그럼, 내 삶도 같이 가라앉는다.
…내가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나는 허리에 매어 있던 가죽 가방을 더듬었다. 기적처럼,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물에 잔뜩 젖어 축 늘어져 있었지만, 분명히 내 몸에 붙어 있었다.
가방을 열어 확인했다.
노트(젖음).
연필(다행히 있음).
나침반(유리 안 깨짐).
흩어진 빵 조각(바닷물 머금은 빵은… 그냥 상상하지 말자).
작은 바늘과 실(젖음).
“…괜찮아. 하나씩.”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이건 엘리너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겁나면 생각하지 말고, 손부터 움직여라.
일단, 내가 가진 건 이 정도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건—
물.
불.
거처.
그리고 내일.
내일은 물과 불과 거처로는 만들 수 없다. 내일은 도구로 만든다.
난파선이 떠 있는 동안, 그 안에 있는 유용한 물건들을 가져와야한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모래 위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머리가 잠깐 핑 돌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몸이 무너질수록 마음은 더 또렷해졌다.
(지금이다.)
지금 아니면 끝이다.
난파선은 저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지만, 바다는 늘 계산이 빠르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파도는 잔해를 더 멀리 끌고 갈 거고, 조류는 남은 것마저 삼켜버릴 것이다.
나는 해변을 뛰기 시작했다. 뛰었다고 하기엔, 거의 비틀거린 것에 가까웠지만.
해변엔 밤새 떠밀려온 것들이 널려 있었다. 나무 조각. 천 조각. 통. 끊어진 밧줄. 깨진 상자. 그리고—
“…밧줄!”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굽혀 밧줄 끝을 잡았다.
굵었다. 젖어 무거웠다. 하지만 끊어지지 않은 부분이 꽤 길었다. 이건… 내 생명줄이 될 수 있다.
나는 밧줄을 끌고 모래 위를 질질 끌며 물가로 갔다. 물이 발목을 적셨다. 차가움이 살을 찢었다.
“차가워…”
나도 모르게 작게 투덜거렸다. 그런데 투덜거릴 힘이 있다는 건 아직 괜찮다는 뜻이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했다.
밧줄 한쪽 끝을 바위에 단단히 감았다. 매듭을 만들 줄 아는 건 다행이었다. 배 위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실용적인 건 늘 이런 것이다. “예쁘게”가 아니라 “죽지 않게.”
매듭을 힘껏 조이고, 밧줄의 다른 끝을 내 허리에 두 번 감았다.
숨을 들이켰다.
“로빈 크루소.”
나는 내가 만든 내 이름을 스스로 불렀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리고 바다로 들어갔다.
—
물은 생각보다 더 거칠었다.
아까까진 조용해 보였는데, 가까이서 마주하니 파도는 내 몸을 밀고, 잡아당기고, 때렸다. 배가 부서질 때 흩어진 목재 조각들이 물 위에 떠다녔다. 그것들이 내 다리를 긁었다.
아프다.
하지만 아픈 건 살아있다는 증거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밧줄을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헤엄을 칠 때마다 옷이 무거워졌다. 치마가 물을 먹고 다리에 감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지… 아니,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나는 숨을 골라야 했다. 파도와 같은 타이밍으로 들이쉬고 내쉬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바다는 사람의 실수를 제일 좋아한다.
난파선은 가까워질수록 더 거대해 보였다.
부서진 돛대, 찢어진 돛, 비뚤어진 난간. 배의 배가 갈라져 뼈처럼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어둠이 보였다. 어둠은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저기… 들어가야 해.)
몸이 떨렸다.
무서웠다.
그렇지만 무서움을 핑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면? 해변에서 굶어죽거나, 숲에서 짐승에게 찢기거나, 물 없이 말라죽겠지.
그런데 배 안에는, 내가 살아갈 방법이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 배의 측면을 붙잡았다. 손바닥이 거친 나무에 쓸려 따끔했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흘렀다.
갑판으로 올라갈 수 있는 부서진 부분을 찾아 발을 걸쳤다. 미끄러웠다. 한 번 미끄러지면? 바다로 떨어진다.
“괜찮아. 하나씩.”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찌질하게 울지 말고, 씩씩하게 올라가자. 지금은 그게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몸을 끌어올렸다.
갑판 위에 올라서자, 바람 냄새가 바뀌었다. 소금기보다 더 깊은 냄새. 젖은 나무 냄새. 금속 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의 잔향.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엘리너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는 없는데도.
(손 놓지 마.)
그녀의 말이 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고, 다시 움직였다.
—
배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배는 소리를 낸다. 바람과 물을 ‘이해하는’ 소리를. 하지만 죽어가는 배는 다른 소리를 낸다. 삐걱, 뚝, 쩍—마치 뼈가 부러지는 소리처럼.
나는 바닥에 널린 물건들을 훑어봤다.
깨진 통. 젖은 천. 금속 조각. 그리고—내 심장이 뛰게 만든 것.
작은 나무 상자.
나는 상자에 달려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공구가 있었다.
망치. 못 몇 개. 짧은 칼. 손도끼 비슷한 것. 작은 톱.
“있다…”
내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기지 않은데 웃음이 나왔다. 이건 기쁨이라기보단, 살겠다는 본능이 입꼬리를 밀어 올리는 느낌이었다.
“있어… 있어…”
나는 공구를 껴안고 싶었지만, 그러면 물에 빠뜨린다. 나는 급히 가죽 가방을 열어 공구를 넣으려 했다. 그런데 가방은 작은 공구 몇 개만 겨우 들어갈 크기였다.
(다 가져가야 해. 어떻게든.)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젖은 천막 비슷한 천을 발견했다. 찢어진 돛 조각이었다. 큰 덩어리.
“좋아. 이걸로 싸자.”
나는 돛 조각을 펴고, 공구와 못을 올리고, 천을 접어 보자기처럼 만들었다. 그걸 밧줄로 묶었다. 손이 떨렸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손이 멈추면 끝.)
그리고 또, 또 찾았다.
큰 밧줄 뭉치.
나무통 하나(아마 물통일 수도).
젖은 옷가지.
작은 통조림…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건 너무 현대적이니까. 대신 건빵 같은 딱딱한 비스킷이 들어있는 상자가 있었다. 젖었지만—그래도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상자를 열고 하나를 깨물었다.

“…”
딱딱했다. 너무 딱딱해서 이빨이 부러질 뻔했다. 물 먹은 돌을 씹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맛이 나쁘지 않았다.
살아있는 맛이었다.
나는 상자를 다시 닫아 보자기 옆에 묶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오늘은 살 수 있어.)
그때, 배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난간을 붙잡았다. 갑판이 기울었다. 파도가 다시 배를 두드렸다. 배는 낮게 울었다.
“아니, 아직 버텨줘…!”
나는 배에게 말하고 있었다. 웃기지? 난파선에게 부탁하는 소녀라니. 그런데 지금 내게는 이게 현실이었다.
배는 대답 대신 삐걱거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몸을 낮췄다. 다음 단계는 운반이다. 몸만 갖고 여기에 들어온 것보다, 물건 가져오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해변까지 이걸 어떻게 끌고 갈까?
나는 갑판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다는 여전히 거칠다. 하지만 처음 들어올 때보다 조금 파도가 낮아진 순간이 있었다. 파도는 일정하지 않다. 틈이 있다. 그 틈을 잡아야 한다.
나는 갑판 옆에 떠다니는 나무 조각들을 보았다. 넓은 판자. 통. 부서진 상자. 그것들을 엮으면…
(뗏목.)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하루만 버티면 된다. 나는 “완벽”이 아니라 “가능”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밧줄을 끌어와 통과 판자를 묶기 시작했다. 매듭을 만들고, 당기고, 다시 묶고. 손이 아팠다. 손바닥이 벗겨졌다. 그래도 묶었다.
마침내, 통 두 개와 넓은 판자 하나를 엮은 초라한 뗏목이 완성됐다. 뗏목이라기보단 떠다니는 짐짝에 가까웠다.
“그래도… 뜨면 됐어.”
나는 보자기 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균형이 흔들렸다. 나는 숨을 참았다. 그리고 밧줄 끝을 잡고 뗏목을 바다로 밀어냈다.
뗏목이 출렁이며 떠올랐다.
떠올랐다!
나는 거의 울 뻔했다.
(됐다.)
나는 밧줄을 잡고, 뗏목을 끌며 배에서 내려왔다. 다시 바다. 다시 차가움. 다시 파도. 하지만 이번엔 내 손에 ‘내일’이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해변을 향해 움직였다.
밧줄이 당겨졌다. 뗏목이 따라왔다. 파도가 한 번 크게 덮쳤다. 뗏목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안 돼!”
나는 허리를 뒤로 젖혀 밧줄을 당겼다. 손바닥이 타는 듯 아팠다. 하지만 뗏목은 버텼다. 보자기 짐도 아직 살아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
나는 중얼거리며 해변까지, 해변까지, 해변까지…
마침내 모래에 발이 닿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뗏목을 끌어당겨 모래 위로 올렸다. 젖은 모래가 무게를 더했다. 그래도 올렸다. 올렸다. 올렸다.
그리고—그 순간.
나는 정말로 숨이 꺼지듯 내쉬었다.
“살았다…”
짐이 모래 위에 올라온 걸 확인한 뒤에야, 나는 내 다리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몸이 그제야 떨렸다. 아까까지 버티던 두려움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난파선은 아직 바다 위에 있다. 아직 내일이 더 남아 있다.
나는 모래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부서진 돛대는 조금 더 낮아져 있었다. 배는 조금 더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보다 더 침묵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나는 상처 난 손바닥을 쥐었다.
(한 번 더.)
한 번 더 들어가면 더 많은 걸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더 들어가면, 더 위험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숲을 봤다.
거처는 없다. 불도 없다. 물도 없다. 이대로 밤이 오면 나는 또 공포 속에서 떨겠지.
그런데 배 안에는… 아까 못 본 것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등불.
칼.
그리고… 혹시. 총?
엘리너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생각하지 마.”
“살고 나서 후회해.”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나는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일어섰다.
“훔치러 간다. 내일을.”
나는 허리 밧줄을 다시 조이고,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두 번째 진입은 더 쉽지 않았다. 몸은 이미 지쳤고, 파도는 내 상태를 알아차린 것처럼 더 거칠게 밀어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해냈다. 한 번 해낸 일은, 두 번째부터 ‘가능’이 된다.
나는 밧줄을 잡아당기며 다시 난파선에 닿았다. 갑판에 올라섰다. 바람은 차갑고, 나무는 더 삐걱거렸다.
이번엔 더 안쪽으로 가야 했다.
선실.
그 어둠 속에… 무언가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괜찮아. 하나씩.”
그리고 한 발 내딛는 순간—
배 안쪽에서
‘쿵’
하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내 아래에서 배가 무너지고 있다.
